“성폭력 피해 아이들 상처딛고 밝게 자라 보람” 여성·아동 인권 보호에 앞장선 이명숙 여성변호사회 회장
“혼자 사신다고 했죠? 의뢰인이 가져 온 인절미인데 좀 가져가서 드세요.”
그를 만날 때마다 늘 손에 무엇인가 들려 있는 것을 봤는데 그날은 떡이었다. 오래전 소송을 맡겼던 의뢰인이 감사 표시로 떡 한 말을 보냈다고 한다. “사무실 직원들과 나눠 먹고도 많이 남았네요”라며 환히 웃는 그에게 후배들은 “엄마 같다”고 입을 모았다.
8일 이명숙(53) 변호사를 만나러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나·우리 사무실을 가는 길에도 ‘오늘은 뭘 들고 있을까’ 궁금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여변) 회장을 맡고 있는 이 변호사가 여느 때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날도 빈 손이 아니었다. 사진 한 컷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애들 많이 컸죠? 예전보다 많이 밝아졌어요. 저번에 사무실에 와서 어찌나 재잘재잘 떠들던지···.” | 이명숙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포함한 지난 2년간의 여성변호사회 활동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
이 변호사가 보여주는 사진 속에서 학생 대여섯이 밝게 웃고 있었다. ‘도가니 사건’으로 잘 알려진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었다. 이 변호사가 속한 여변은 인화학교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을 대리했다. “이날 이 친구들과 빵도 같이 먹고, 얘기도 많이 했는데 사건이 끝나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여느 때보다 명랑하더라고요.” 이 변호사는 2008년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인 나영이(가명), 2011년 어머니를 살해하고 시신을 8개월간 방치했던 지모군 등과도 계속 연락하고 지낸다.
나영이 등 다른 학생들의 사진도 한 장씩 넘겨 보던 이 변호사의 눈가가 순간 촉촉해졌다. “나영이의 경우 비슷한 사건을 겪은 다른 피해자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이 아이들이 잊힌 존재가 아닌 국민의 지지와 성원을 받고 커가는 ‘상징적인 인물’이 됐으면 좋겠어요.”
변호사 경력 26년째를 맞은 그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가정·아동·성소수자와 관련한 사건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사다. 처음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던 1990년에는 여성 변호사가 10명 남짓이어서 가정(성)폭력·아동학대 사건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법률 서비스를 지원해 주는 변호사가 드물었다. 여성·가족 분야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이 변호사는 자연스럽게 관련 사건들을 맡아오다 2014년 여변 회장으로 취임해 ‘아동학대 사건 법률지원 공동변호인단’, ‘아동학대 방지 전담 변호사’,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최근에는 미성년자와의 성관계 시 동의 여부와 관계 없이 처벌할 수 있는 ‘의제강간’ 연령을 만 13세 미만에서 만 16세로 올리기 위한 입법개정 활동도 하고 있다. “물리적인 폭행이나 협박 없이도 위압적 분위기에서 이뤄지는 성관계는 ‘거부와 저항’이 없었더라도 강제적인 겁니다. ‘슈퍼 갑’들의 강제에 의한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첫걸음을 밟고 있지요.” 여변은 가정폭력에 노출된 다문화 가정의 여성을 위해 이혼 관련 법률 상식을 영어, 중국어로 번역해 관련 기관에 제공하는 등 다문화 사회에 맞는 지원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필리핀 여성과 한국인 남성 사이의 자녀를 이르는 ‘코피노’를 양육하는 필리핀 여성들이 제기한 양육비 청구소송을 무료 지원해주는 게 대표적이다.
22일 여변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그에게 그동안 활동 소감을 물었더니, 단연 ‘세월호 참사’의 기억이 가장 강렬했다고 한다. 대한변협 세월호참사 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도 활동한 이 변호사는 “당시 피해자 대부분이 단원고 학생이었고, 피해 학생들 중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친구가 많았어요. 배상 문제를 두고 친권과 양육권이 정리되지 않은 가족들이 있어 안타까웠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또 외교계 여성단체와 함께 위안부 피해자의 노벨평화상 수상 활동을 펼치기도 했던 이 변호사는 최근 한·일 정부가 타결한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말도 안 되는, 정말 납득하기 힘든 합의 내용입니다. (양국 합의사항이)아직 법적 효력이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없는 만큼 대한변협 일제특위와 함께 사태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어요.”
2년간 사회적 약자와 여성변호사의 ‘엄마’를 자처했던 그의 신년계획을 들어 봤다.
“그동안 여변이 사회 각 분야에서 외연을 넓혀왔다면 이제는 후배 변호사들의 복지에도 신경을 쓰고 싶어요. 요즘 경기가 안 좋아 젊은 변호사들이 힘들긴 해도 ‘접견 변호사’로 내몰리는 여성 변호사는 극소수예요. 극단에 내몰리는 후배가 단 한 명도 없도록 ‘멘토-멘티제’를 도입할 생각입니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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