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이 찾아간 집이었다.
그런데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백 살을 바라보는 노모가 혼자 사는 집이 아니라
잘 관리되고 있는 오래된 박물관에 들어선 것 같았다.
구석구석 정갈했다.
집 안 곳곳을 도예 작품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소파도, 거실 가구도
70년 넘게 한 번도 바꾸지 않고 그 자리에 두었다고 했다.
벽에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 초반의 흑백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나비넥타이를 맨 소년들, 원피스에 구두를 신은 소녀들,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는 정장 차림의 남녀 어른들.
넉넉하고 행복했던 어느 유태인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사진을 하나하나 설명하던 어머니가
한 액자 앞에서 말을 멈췄다.
남편이 나치에게 끌려갔다고 했다.
한동안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고.
남은 가족들은 지금 이 집에 있는 작품들을 챙겨
나찌의 눈을 피해 서둘러 미국으로 밀항했다고.
미국에 닿고 얼마 뒤,
신문에 큰 기사가 실렸다고 했다.
'Jews Arriving at Auschwitz'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태인들)
그곳으로 실려 가 가스실에서 숨진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끌려가는 사람들 사진 속에
남편의 얼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This is my husband."
(이 사람이 내 남편이에요.)
어머니는 담담했다.
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 신문을 펼쳐 든 손이 얼마나 떨렸을까.
생사라도 알고 싶다던 간절한 기도는
그렇게, 가장 참혹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가족은 그 신문 사진을 영정으로 모셨다.
사진이 찍힌 날을 기일로 삼았다.
그렇게 지금까지 애도해 왔다.
친척들도 여럿 아우슈비츠 같은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마지막 모습이라도 확인된 사람은
교수님의 아버지 한 사람뿐이라고 했다.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
언제 떠났는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누군가 찍은 신문 사진 한 장.
장남은 아버지의 흙을 이어받았다.
그것도 작은 그릇이 아니라
집채만 한 도예 작품으로.
아버지를 잃은 분노와 한이
그렇게 크게, 크게 자라난 것은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독일에서 가져온 작품과
미국에 처음 와서 장만한 소파와 탁자, 식탁을
70년 넘게 그대로 지켜 왔다.
어쩌면 그것들이 남편의 분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모습이 담긴 액자를 날마다 마주하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듯 살아온 세월.
어머니의 시간은
남편과 헤어진 그날에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마치 망부석처럼.
교수님의 남동생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가족이 생기면 가족이 아플 일도 생길 거라는 생각에
그 아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차마 결혼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린 날 아버지를 잃은 기억이
그를 평생 혼자 살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상실이었지만
남은 흔적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달랐다.
이제 어머니도, 남동생도 떠났다.
벽 가득한 가족사진 속 얼굴들 가운데
홀로 남은 교수님.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 얼굴들을
그는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이별이든 이별은
남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변호사로서 나는 수많은 이별을 보아 왔다.
원하지 않던 이혼, 사별, 이별...
갑자기 찾아온 이별 앞에서
상실과 비통, 그 트라우마를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 걸까.
그 집의 액자 속 사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 질문 앞에 오래 머물곤 한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이명숙 변호사의 이혼법정'에 먼저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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